얼마전 모 교육기관에서 두 번에 걸쳐 총 8시간 동안 MaxMSP워크샵을 진행했습니다.
그 때 느꼈던 디자이너의 딜레마를 여기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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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샵은 MaxMSP라는 툴의 기본 개념과 사용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간단한 예제들을 만드는 것을 보여주면서, 따라 만들게 시켰었죠.
첫번째 예제는 메트로놈 만들기였습니다.
그리고, 각자 만들어 보던 중에 따로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워크샵 전에 교수님께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학생이 말한 것은 RGB센서로 어떤 물체의 컬러를 읽어내고, 거기에 맞는 사운드를 내보내는 컨셉이더군요)
조금 과격하긴 했지만, 이런 논쟁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디자이너가 알아야 할 보조 지식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주변 지식은 위에서 처럼 전자, 전산에 관한 것일수도 있고, 제품의 대량생산방식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철학이나 근현대사일수도 있고 마케팅이나 경영학일수도 있겠죠. 산업디자인은 interdisciplinary domain학제적 영역이라고 불립니다. 수많은 인접 학문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할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거꾸로 얘기하자면 디자인이라는 학문의 영역이 뚜렷하게 정해져있지 않아서 자꾸 다른 영역으로부터 이론들을 가져오다 보니 정체성이 흐려졌다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굳이 하나하나 예를 들지 않아도 산업디자인에서 '지식체계'라고 불리우는 것들의 절대다수가 외부 학문들로부터 가져온 것들입니다.
물론 디자이닝의 중심에는 '조형'이라는 활동이 있습니다. 하지만 (건축이나 공학 등에서와 달리) 산업디자이너의 조형활동은 '타고난 감각', '번뜩이는 아이디어' 처럼 신비로운 무언가로 묘사될 뿐입니다. 디자인 잡지는 그림책 혹은 사진집일 뿐이고, 전시장에서 디자이너들은 눈과 뇌를 사진기처럼 활용하며 스스로의 '취향'과 맞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려고 노력할 뿐이죠. 발표와 크리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정말 멋지죠? " 처럼 이성과 감성을 분리시켜서 느낄 것을 유도합니다.
만일 조형활동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참 행복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디자인계 내에서의 경쟁은 점차 순수조형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분야의 지식들을 습득하라고 압박을 가하죠.
첫번째 압박으로, 다른 영역들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이해하고 조율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마케팅, 공학, 역사, 철학, 경영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대한 필요를 느낍니다. 리서치라고 불리는 활동에 필요한 지식들이죠. 이런 지식이 잘 뒷받침해줄수록 솔루션의 설득력은 높아지고 예측할 수 있는 리스크는 감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솔루션'이 반드시 디자인 조형활동의 결과랑 그다지 연관성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A라는 지역자치단체의 로고를 디자인함에 있어서 진취성과 지역간의 화합을 강조하고, 특산품인 고구마, 위인 장보고의 이미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제약사항이 어떤 솔루션을 내어놓는다고 해도 그것이 최종 도안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지는 못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디자이너들은 주변 요소들 중 아주 일부만을 고려해서 디자인 할때 더 효과적으로 innovation을 이끌어 낼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90년대후반부터 Systematic Methodology가 더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변 지식을 익히게 되는 두번째 계기는, 최신 테크놀로지를 익힘으로서 새로운 디자인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입니다. Arduino나 MaxMSP와 같은 프로토타이핑 테크닉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인터랙션을 '발명'할 수 있게 해줍니다. 때로는 Rapid Prototype(아주 빠르게 만들어낸 모형)을 통해서 상상속에서와는 전혀 다른 효과를 느끼게 되기도 하고, 기존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도 하죠. 하지만 많은 경우, '발명' 자체는 디자이너의 몫이 아닙니다. 디자이너는 그 발명품 위에 조형활동을 얹게 되죠.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디자이너가 발명부터 조형까지 전부 커버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그리고 무엇보다 비용 대비 효과면에서) 를 생각할 때 디자이너가 '발명'을 목표로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조형활동 외의 지식은 주변지식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주변지식을 깊게 공부할수록 '조형에만 매진하는 디자이너'와 '주변지식 전문가' 사이에서 제너럴리스트의 딜레마를 겪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디자인 학부를 마치고 현업에 종사했거나 혹은 교육계로 진출한 중견 디자이너들은 절충안을 내어놓습니다. 얼마나 깊이 디자인 외 지식을 얻을 것인가? 에 대한 답이죠.
'주변 지식 전문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본 개념의 탑재'
그리고
'상상력을 가동시킬수 있을만큼의 이해'.
위 두가지만 만족시킨다면 더 이상 주변지식에 대한 탐닉한다고 해도 조형활동에 미치는 플러스 효과는 크게 기대하기 힘듭니다. 물론 디자이너 개개인의 상황에 맞춰서 특정 주변지식을 깊이 파는 것이 오히려 쉬울수도 있고, 활용범위도 넓을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중고등학교때 수학을 무척 좋아했던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프로그래밍. 혹은 주변에서 전문가를 찾기 힘든 상황) 하지만 이 글은 디자이너들의 평균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썼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디자인 교육에 있어서 주변지식의 강조는 전문영역의 구분법도 변화시킵니다. 예전에 디자이너의 전문영역이 디자인활동의 대상(자동차,보석,제품,시각,웹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반해서, 이제는 어떤 주변지식의 숙련도(전략기획, 문화이론 및 급진적 컨셉, 인터페이스 설계, 실험 및 데이터 분석, 3D모델링, 2D그래픽, 프로토타이핑 전문가 등)로 디자이너가 할수 있는 일을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디자인 팀 내부에서의 분업화는 조형활동을 하지 않는 디자이너들도 함께 만들어냅니다. 어떤 프로젝트에서든 조형활동을 총괄하는 디자이너는 많아야 두명이면 족하고, 나머지는 목업, 프로그래밍 혹은 문서작업 등 주변 지식을 활용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여러번 반복되면 어느새 디자이너 그릅 내에서 (그리고 스스로도) 주변 지식 전문가로 인식하게 되기도 합니다. 디자인과의 학생들은 학과에서 제공하는 커리큘럼 뿐만아니라 다양한 산학 프로젝트나 공모전 활동을 통해서 (디자인 활동 내에서의) 전문분야와 스킬셋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취업과 아르바이트, 그리고 경쟁력있는 공모전 팀에 발탁되기 위해서는 잘 밸런스 잡힌 스킬셋을 갖추는 것이 전반적인 조형능력보다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그룹 혹은 회사 내에 이미 조형이나 컨셉 전문가가 자리잡고 있는 경우) 디자인 계열의 학생들이 단순한 조형 연습만으로는 스스로의 경쟁력을 늘리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주변 지식을 포함한 눈에 보이는 스킬을 늘리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죠.
하지만 학교의 디자인 교육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스킬셋 간의 밸런스가 아니라, 조형연습과 스킬 그리고 주변지식 간의 상보적 융합입니다. 주변지식에 너무 치우지게 되면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스킬에 너무 치우치면 오퍼레이터 이상 성장하기 힘들죠. 순수 조형연습에만 투자하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세가지 조합이 단순한 양적인 균형이 아니라, 번갈아가며 서로를 향상시키는 데에 사용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런 면에 평가할 때, 98년 이후부터 04년까지의( 그 이전과 이후는 제가 알지 못하므로) 카이스트 산디과는 주변 지식과 특정 스킬에 큰 비중을 두고 조형활동의 비중은 무척 낮았습니다. 졸업 후에도 그 불균형이 점점 더 심화되어가기 때문에 '한 때 디자인을 배운' 대기업의 기획자,UI설계자,컨설턴트 등의 위치를 갖게 되어, 디자이너들이 아니라 전문 마케터, 엔지니어, 경영학 전공자들과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미대에 속한 5~10위권 디자인과에서는 특정 디자인 스킬(스케치,3D모델링,플래시 액션스크립트 등) 이 가장 강조됩니다. 졸업생들은 오퍼레이터로서 취업하게 되어 몇년 안에 조형을 총괄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취업하는 중소기업과 에이전시들이 대기업의 아웃소싱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큰 의사결정은 전부 대기업에서 이루어지고, 이들 대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한계를 실감하게 됩니다. 사실 이들이 가장 원하는 환경은 유럽식의 소규모 스튜디오들에서 급진적인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조형 경험의 부족과 사업적 여건상 현실적으로 선택할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학이 유일한 탈출구일까요?
급격히 높아지는 국내 물가와 대학등록금으로 미루어 볼때, 영국을 제외한 유럽권 유학에 들어가는 비용은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오는 비용과 동등합니다. 미국의 유명 아트스쿨의 경우에도 1.5~2배의 비용으로 보다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에 해볼만한 투자로 받아들여지죠. 물론 유학생들의 지상과제인 현지 취업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귀국후 국내 대기업에 들어갈 수는 있으니 (아트디렉터로서의 역할에 만족한다면) 손해는 아니겠죠.
만에 하나, 10년 이내에 국내에서 소규모 디자인 에이전시들이 (대기업 외주가 아니라) 독창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다면 (즉, 많은 디자이너들이 원하는 작업을 하기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위에서 말한 조형과 스킬 그리고 주변지식의 상호보완적 균형은 한국의 디자인 발전에 큰 역할을 할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님말구요.
그 때 느꼈던 디자이너의 딜레마를 여기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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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샵은 MaxMSP라는 툴의 기본 개념과 사용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간단한 예제들을 만드는 것을 보여주면서, 따라 만들게 시켰었죠.
첫번째 예제는 메트로놈 만들기였습니다.
임의의 시간(n/1000초) 마다 bang(빵! 하는 내부신호) 을 날리고, 그 신호가 날라올 때마다 소리를 만들어서 스피커로 내보낸다. 1/2 , 1/4 , 1/8 박자 등의 설정에 맞추어 n번 똑딱거릴때마다 다른 소리가 나야 만들어야 함.
패치 프로그래밍의 기본적인 논리구조를 이해하지 않으면 헤매기 좋은 '첫번째 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각자 만들어 보던 중에 따로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 : 잘 만들어지나요? 혹시 질문이나 워크샵 진행에 대해 하고싶은 말 없어요?
학생 : 대충 개념은 이해하겠는데 직접 만들려고 하니까 헤깔리네요..
이런거 말고 우리가 정말 필요한 걸 알려주시면 안되나요?
나 : 네? (-_-;;;) 필요한게 뭔데요?
학생 : 저기... 앞으로 2주 안에 산학 과제로 워킹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걸 만드는 데 필요한 지식을 배웠으면 하는데...
학생 : 대충 개념은 이해하겠는데 직접 만들려고 하니까 헤깔리네요..
이런거 말고 우리가 정말 필요한 걸 알려주시면 안되나요?
나 : 네? (-_-;;;) 필요한게 뭔데요?
학생 : 저기... 앞으로 2주 안에 산학 과제로 워킹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걸 만드는 데 필요한 지식을 배웠으면 하는데...
(사실 워크샵 전에 교수님께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학생이 말한 것은 RGB센서로 어떤 물체의 컬러를 읽어내고, 거기에 맞는 사운드를 내보내는 컨셉이더군요)
나 : 저는 이 워크샵을 하면서 MaxMSP의 기본을 알려주러 온거지, 특정 프로토타입 만드는 최대한 쉬운 방법을 알려주러 온 건 아녜요. 설사 알려준다 쳐도 기본을 모르면 어떻게 만들건데요?
학생 : (컨셉을 설명하면서) 컬러센서를 써서 색을 알아내고 mp3내보내는 방법만 알려주시면 되죠.
나 : 지금은 어떻게든 구현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럼 이런 워크샵을 갖는 의미도 없을 뿐더러 나중에 다시 MaxMSP를 열어보는 일도 없을 거예요. 어차피 졸업하고 실무에서 일하면서는 MaxMSP같은거 쓸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개념과 논리구조를 알고 디자인하는 거랑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있는데 그걸 왜 모르죠?
학생 : 만일 정말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려고 했다면 이런 수업을 한학기 짜리로 듣지 이렇게 몇 시간짜리 워크샵으로 했겠어요? 뜻은 알겠는데, 일단 2주 뒤까지 프로토타입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학생 : (컨셉을 설명하면서) 컬러센서를 써서 색을 알아내고 mp3내보내는 방법만 알려주시면 되죠.
나 : 지금은 어떻게든 구현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럼 이런 워크샵을 갖는 의미도 없을 뿐더러 나중에 다시 MaxMSP를 열어보는 일도 없을 거예요. 어차피 졸업하고 실무에서 일하면서는 MaxMSP같은거 쓸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개념과 논리구조를 알고 디자인하는 거랑 아닌 것은 큰 차이가 있는데 그걸 왜 모르죠?
학생 : 만일 정말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우려고 했다면 이런 수업을 한학기 짜리로 듣지 이렇게 몇 시간짜리 워크샵으로 했겠어요? 뜻은 알겠는데, 일단 2주 뒤까지 프로토타입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나 :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정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밖에 안되죠! 직접 만들어보면서 전자제품이 돌아가는 원리를 이해하고, 처음에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의 개선안을 낼 수 있어야 프로토타입을 하는 보람이 있는 거예요.
(그 뒤로도 따다다다~~ 쏘아붙였고, 결국 쉬는 시간이 지나도 그 학생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근데 다음 시간엔 나왔습니다...
근데 다음 시간엔 나왔습니다...
조금 과격하긴 했지만, 이런 논쟁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디자이너가 알아야 할 보조 지식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요?
주변 지식은 위에서 처럼 전자, 전산에 관한 것일수도 있고, 제품의 대량생산방식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철학이나 근현대사일수도 있고 마케팅이나 경영학일수도 있겠죠. 산업디자인은 interdisciplinary domain학제적 영역이라고 불립니다. 수많은 인접 학문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할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거꾸로 얘기하자면 디자인이라는 학문의 영역이 뚜렷하게 정해져있지 않아서 자꾸 다른 영역으로부터 이론들을 가져오다 보니 정체성이 흐려졌다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굳이 하나하나 예를 들지 않아도 산업디자인에서 '지식체계'라고 불리우는 것들의 절대다수가 외부 학문들로부터 가져온 것들입니다.
물론 디자이닝의 중심에는 '조형'이라는 활동이 있습니다. 하지만 (건축이나 공학 등에서와 달리) 산업디자이너의 조형활동은 '타고난 감각', '번뜩이는 아이디어' 처럼 신비로운 무언가로 묘사될 뿐입니다. 디자인 잡지는 그림책 혹은 사진집일 뿐이고, 전시장에서 디자이너들은 눈과 뇌를 사진기처럼 활용하며 스스로의 '취향'과 맞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려고 노력할 뿐이죠. 발표와 크리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보세요. 정말 멋지죠? " 처럼 이성과 감성을 분리시켜서 느낄 것을 유도합니다.
만일 조형활동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참 행복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디자인계 내에서의 경쟁은 점차 순수조형행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분야의 지식들을 습득하라고 압박을 가하죠.
첫번째 압박으로, 다른 영역들에서 요구하는 사항들을 이해하고 조율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마케팅, 공학, 역사, 철학, 경영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대한 필요를 느낍니다. 리서치라고 불리는 활동에 필요한 지식들이죠. 이런 지식이 잘 뒷받침해줄수록 솔루션의 설득력은 높아지고 예측할 수 있는 리스크는 감소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솔루션'이 반드시 디자인 조형활동의 결과랑 그다지 연관성 없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A라는 지역자치단체의 로고를 디자인함에 있어서 진취성과 지역간의 화합을 강조하고, 특산품인 고구마, 위인 장보고의 이미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제약사항이 어떤 솔루션을 내어놓는다고 해도 그것이 최종 도안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지는 못한다는 것이죠. 실제로 디자이너들은 주변 요소들 중 아주 일부만을 고려해서 디자인 할때 더 효과적으로 innovation을 이끌어 낼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90년대후반부터 Systematic Methodology가 더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주변 지식을 익히게 되는 두번째 계기는, 최신 테크놀로지를 익힘으로서 새로운 디자인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입니다. Arduino나 MaxMSP와 같은 프로토타이핑 테크닉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인터랙션을 '발명'할 수 있게 해줍니다. 때로는 Rapid Prototype(아주 빠르게 만들어낸 모형)을 통해서 상상속에서와는 전혀 다른 효과를 느끼게 되기도 하고, 기존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도 하죠. 하지만 많은 경우, '발명' 자체는 디자이너의 몫이 아닙니다. 디자이너는 그 발명품 위에 조형활동을 얹게 되죠.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물론 디자이너가 발명부터 조형까지 전부 커버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그리고 무엇보다 비용 대비 효과면에서) 를 생각할 때 디자이너가 '발명'을 목표로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됩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조형활동 외의 지식은 주변지식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주변지식을 깊게 공부할수록 '조형에만 매진하는 디자이너'와 '주변지식 전문가' 사이에서 제너럴리스트의 딜레마를 겪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디자인 학부를 마치고 현업에 종사했거나 혹은 교육계로 진출한 중견 디자이너들은 절충안을 내어놓습니다. 얼마나 깊이 디자인 외 지식을 얻을 것인가? 에 대한 답이죠.
'주변 지식 전문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본 개념의 탑재'
그리고
'상상력을 가동시킬수 있을만큼의 이해'.
위 두가지만 만족시킨다면 더 이상 주변지식에 대한 탐닉한다고 해도 조형활동에 미치는 플러스 효과는 크게 기대하기 힘듭니다. 물론 디자이너 개개인의 상황에 맞춰서 특정 주변지식을 깊이 파는 것이 오히려 쉬울수도 있고, 활용범위도 넓을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중고등학교때 수학을 무척 좋아했던 디자이너에게 있어서 프로그래밍. 혹은 주변에서 전문가를 찾기 힘든 상황) 하지만 이 글은 디자이너들의 평균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썼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디자인 교육에 있어서 주변지식의 강조는 전문영역의 구분법도 변화시킵니다. 예전에 디자이너의 전문영역이 디자인활동의 대상(자동차,보석,제품,시각,웹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반해서, 이제는 어떤 주변지식의 숙련도(전략기획, 문화이론 및 급진적 컨셉, 인터페이스 설계, 실험 및 데이터 분석, 3D모델링, 2D그래픽, 프로토타이핑 전문가 등)로 디자이너가 할수 있는 일을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디자인 팀 내부에서의 분업화는 조형활동을 하지 않는 디자이너들도 함께 만들어냅니다. 어떤 프로젝트에서든 조형활동을 총괄하는 디자이너는 많아야 두명이면 족하고, 나머지는 목업, 프로그래밍 혹은 문서작업 등 주변 지식을 활용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일이 여러번 반복되면 어느새 디자이너 그릅 내에서 (그리고 스스로도) 주변 지식 전문가로 인식하게 되기도 합니다. 디자인과의 학생들은 학과에서 제공하는 커리큘럼 뿐만아니라 다양한 산학 프로젝트나 공모전 활동을 통해서 (디자인 활동 내에서의) 전문분야와 스킬셋을 발전시켜 나가는데, 취업과 아르바이트, 그리고 경쟁력있는 공모전 팀에 발탁되기 위해서는 잘 밸런스 잡힌 스킬셋을 갖추는 것이 전반적인 조형능력보다 중요하게 작용하기도 합니다. (특히 그룹 혹은 회사 내에 이미 조형이나 컨셉 전문가가 자리잡고 있는 경우) 디자인 계열의 학생들이 단순한 조형 연습만으로는 스스로의 경쟁력을 늘리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주변 지식을 포함한 눈에 보이는 스킬을 늘리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죠.
하지만 학교의 디자인 교육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스킬셋 간의 밸런스가 아니라, 조형연습과 스킬 그리고 주변지식 간의 상보적 융합입니다. 주변지식에 너무 치우지게 되면 제너럴리스트가 되고, 스킬에 너무 치우치면 오퍼레이터 이상 성장하기 힘들죠. 순수 조형연습에만 투자하는 것은 비효율적입니다. 세가지 조합이 단순한 양적인 균형이 아니라, 번갈아가며 서로를 향상시키는 데에 사용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런 면에 평가할 때, 98년 이후부터 04년까지의( 그 이전과 이후는 제가 알지 못하므로) 카이스트 산디과는 주변 지식과 특정 스킬에 큰 비중을 두고 조형활동의 비중은 무척 낮았습니다. 졸업 후에도 그 불균형이 점점 더 심화되어가기 때문에 '한 때 디자인을 배운' 대기업의 기획자,UI설계자,컨설턴트 등의 위치를 갖게 되어, 디자이너들이 아니라 전문 마케터, 엔지니어, 경영학 전공자들과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미대에 속한 5~10위권 디자인과에서는 특정 디자인 스킬(스케치,3D모델링,플래시 액션스크립트 등) 이 가장 강조됩니다. 졸업생들은 오퍼레이터로서 취업하게 되어 몇년 안에 조형을 총괄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취업하는 중소기업과 에이전시들이 대기업의 아웃소싱 업무를 담당하기 때문에 큰 의사결정은 전부 대기업에서 이루어지고, 이들 대부분은 비정규직 노동자로서의 한계를 실감하게 됩니다. 사실 이들이 가장 원하는 환경은 유럽식의 소규모 스튜디오들에서 급진적인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조형 경험의 부족과 사업적 여건상 현실적으로 선택할수 있는 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학이 유일한 탈출구일까요?
급격히 높아지는 국내 물가와 대학등록금으로 미루어 볼때, 영국을 제외한 유럽권 유학에 들어가는 비용은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오는 비용과 동등합니다. 미국의 유명 아트스쿨의 경우에도 1.5~2배의 비용으로 보다 나은 교육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에 해볼만한 투자로 받아들여지죠. 물론 유학생들의 지상과제인 현지 취업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최소한 귀국후 국내 대기업에 들어갈 수는 있으니 (아트디렉터로서의 역할에 만족한다면) 손해는 아니겠죠.
만에 하나, 10년 이내에 국내에서 소규모 디자인 에이전시들이 (대기업 외주가 아니라) 독창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할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다면 (즉, 많은 디자이너들이 원하는 작업을 하기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위에서 말한 조형과 스킬 그리고 주변지식의 상호보완적 균형은 한국의 디자인 발전에 큰 역할을 할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님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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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ills of design is in a dilemma
Tracked from digitypo blog 2008/09/16 13:33
reflect9에서 가끔 글을 퍼오는데 내용은 디자이너들이라면 한번 쯤 고민해봐야할 것 들만 퍼온다. 흥미롭다. :)지금 인터랙션 디자인과 학생들은 이 이야기가 피부로 못 느끼지 못하겠지만 실..
Leave your greetings here.
digitypo 2008/09/16 00:33 Modify/Delete Reply Address
참으로 디자이너들의 삶은 고달픈거 같아요. 창의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란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닌 듯 싶어요. 누구 말대로 디자이너들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 정말 '갑'의 입장이 되기 힘든 것인지. 디자이너들은 생각보다 더 복잡한 환경에서 늘 끊임없이 적응 훈련을 하는 듯 싶어요. 위의 글 읽으면서 고민을 잠깐 해보네요. 디자이너가 시대 운동가들처럼 영향력이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reflect9 2008/09/17 00:24 Modify/Delete Address
어쩔수 없는 흐름이겠지만, 역으로 디자이너가 가장 되어서는 안되는 직업이 바로 서비스업인것 같아요.
=ㅠ= 필립스탁이 최근 말하길, 미래에는 디자이너들이 헬스트레이너나 요가선생같이 일반인들의 소비행위를 트레이닝시켜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네요.
시대의식이 거세된 오퍼레이터들의 양산이 계속 유지된다면 가능할수도 있겠죠. 하지만 디자인이 부와 명예는 커녕 기본 생존권을 보장받기 힘든 직업군이라는 것이 드러난 이상, 예전처럼 꿈에 부풀어 디자인과를 지원하는 예비 대학생들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겠죠.
그렇게 해서 인력 수요에 공급은 맞춰지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급변하는 산업, 문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다면 디자이너의 사회적 지위는 계속해서 떨어져갈까봐 걱정일 뿐입니다.
siniz 2008/09/19 18:15 Modify/Delete Reply Address
시대운동가의 영향력? 사회적 지위?
-_-;
to be honest, why do we need it?
reflect9 2008/09/19 23:06 Modify/Delete Address
why don't we?
세상의 어떤 직업군이 인정받고싶지 않아할까. --;
물론 영향력, 지위 같은것에 집착하는게 위선일수도 있지만... 클라이언트의 재산증식을 지상과업으로 생각하면서 인생을 후까시로 살아가는 것이 절대다수의 운명임을 생각한다면 why not.
siniz 2008/09/20 00:31 Modify/Delete Address
클라이언트의 재산증식을 지상과업으로 생각하면서
인생을 후까시로 살아가는 것이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이 있으면 좀 더 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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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언트의 재산증식을 지상과업으로 생각하면서
인생을 후까시로 살아가는 것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을 잃는 것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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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ry, but I'm really tired of people blaming the situation. destiny? I don't think it's the right word for that. that's what they chose just without knowing it.
reflect9 2008/09/20 00:55 Modify/Delete Address
내 말이 좀 헤깔리게 써졌는데..
[클라이언트~후까시]로 살지 않기 위해서 디자이너들이 노력을 해야한다는 거쥐.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적 영향력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부수적으로 주어질테고.
(좀 많이 돌긴 했지만) 원글의 취지는 정치적 디자인이나 사회발전같은 목표의식과는 좀 다른 얘기였음. 목적이 뭐든 간에, 디자인이라는 매우 독특한 활동이 현재의 (짜집기 이론 + 닥치고 실기)의 상황을 벗어났으면 하는 막연한 희망얘기지.
제목에서 딜레마라고 한 것은, 디자인을 함에 있어서 '새로운 지식을 안 배울수도 없고, 배워도 배워도 끝도 없는 것이 별로 쓸데도 없다'는 상황을 말하는 거야.
[얘기를 하면 할수록 논점이 늘어나네 ㅎㅎㅎ]
siniz 2008/09/19 18:19 Modify/Delete Reply Address
one question,
왜 그 학생에겐 안된다고만 한 거지?
학생이 요구하는 특정 케이스를 엮어서 기본을 설명할 수는 없었나?
기본이란 건 모든 케이스에 걸쳐있으니 기본일 것이고,
한 걸음을 즐겁게 딛을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 정도도
역할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전체를 다 설명하고 가르쳐줄 필요는 어차피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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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애새끼가 싸가지없게 굴었으면 말고. 냐하!
reflect9 2008/09/19 23:13 Modify/Delete Address
아니.. 음... 그런건 아니었고.
(결국 그 컨셉에 대해 이래저래 하라고 알려주긴 했음)
왜 안된다고 했냐면... 전에 여기저기서 그런식으로 알려준 케이스 중에 잘된 적이 없었거덩. (알려준다고 알아서 하는게 아니라 그냥 포기하거나 다른 식으로 다른곳에서 도움을 얻더라구)
거 오래된 속담이 있잖냐.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고기잡는 법을 알려줘라" 던가? 니 말대로 고기 맛부터 일단 보게 하고, 알아서 잡는 법을 익히든 말던 상관안할수도 있겠지만... 아마 좀 지겨워졌나 보다.
siniz 2008/09/20 00:21 Modify/Delete Address
응.
잘했다.
니 스스로 지치지 않을 만큼 가르쳐주는 게 중요하그찌.
100명 모두가 데스퍼레이트하게 물어제낄 거고,
95명은 가르쳐줘도 니 말처럼 나가떨어질 테지만
가능성의 냄새를 맡고 긍정적으로 달려드는 5명을
발견하는 게 결국 득이고 목표이지 않을까 싶어서 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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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없으면 패쓰 or 패거나. 음홋홋
박선영 2009/12/16 12:50 Modify/Delete Reply Address
교수님 블로그 가끔와서 보는데 이 글은 처음보네요.
너무 잘읽었어요. 학교다닐때도 졸업하고나서도 여전히 고민되는 문제였는데
제가 좀더 적극적인 학생이었더라면 수업들을때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음 좋았을뻔 했네요.
암튼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종종 또 올려주십사~
reflect9@hotmail.com 2009/12/17 09:52 Modify/Delete Address
허름한 낙서를 잘 읽어줬다니 내가 감사할 따름이네요. 잘 살고있죠?
은경 2010/03/05 15:02 Modify/Delete Reply Address
탁연오빠 오래간만이에요. 주호 홈페이지에서 건너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머리 터지게 고민하고 있는 문제였는데. HCI research 한다그러면 디자이너에게 cs skillset을 자연스럽게 바라는 분위기에서 프로그래밍의 세계에 발을 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항상 고민만 하고 있는 중입니다...
눈 많이 왔다 하는데 잘 지내고 계세요?
reflect9@hotmail.com 2010/03/06 07:11 Modify/Delete Address
안녕~? 눈 많이 왔지만 이제 다 녹았지...